전승
종합 무술의 기원
무술을 무도라고 칭하는 이유는 무술에 도 즉 철학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무술의 기본인 심신수양은 도에서 창출이 되며,
무술의 근본 골격은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에서 비롯되며, 이 세가지의 무술의 골격을 완성시켜 나아가는 데에는 철학의
공부가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 하겠다.
무술의 기원이 불교의 영향으로 시작되였기에 많은 무술이 종교의 의식이 배여있던것을 전승 종합 무술의 창시자인 송덕순은 종교적
인 개념을 없애고 순수 철학을 접목을 시키기 위해서, 성리학을 접목을 시켯으며, 따라서 전승무술의 기본 골격의 완성은 송시열때
부터라고 생각한다.

노자 (531BC)의 철학과 태극권

노자의 철학이 태극권을 만난 중요 요소는
의식,호흡,동작의 협조를 추구하고 노자의 전기치유(專氣致柔 : 기에 전념해 부드러움에 이름),
이유극강(以柔克强 : 부드러움으로 굳센 것을 이김) 그리고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하며 연정화기(鍊精化氣) ,
연기화신(鍊氣化神) , 연신환허(鍊神還虛)되는 기(技)를 도(道)로 승화시킨
기화지도(氣化之道)이다.
우주의 근원을 태극이라 한다. 태극은 원래 무이며 동정의 근원이며 음양의 어머니이다.
한번 움직이면 천변 만화를 낳고 조용히 가라 앉으면
원래의 무로 돌아온다.
이러한 자연 법칙에 따라 태극권의 기는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상대의 변화에 따라 뻗어 나간다. 상대가
강하고 자신이 약할 때는 거스르지
말고 흘려 보내는 것을 주라한다. 자신을 유리한 입장에 두고 상대를 불리한 방향이나 자세에 두는 것을
점이라 한다.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이쪽도 움직인다. 천변 만화해도 그 근원의 도리는 하나이다. 자세를 여러 번 반복해
수련함으로써 비로소 경을 알수 있고
경을 이해함으로써 태극권의 궁극적인 의의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오랜 수련을 거치지 않으면 이 경지에
도달할 수가 없다.
무념무상으로 기를 단전에 모으고 자세를 바르게 하면 상대의 허실을 헤아릴 수 있고 상대 고저의 기를 알
수 있으며 나아가서 상대의
진퇴까지를 알 수 있어 상대의 움직임에 따른 무한한 변화를 구사할 수 있다. 상대가 나를 모르고 내가
상대를 알면 맞설 적이 없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움직임이 흐트러지고 너무 장중하면 움직임이 막힌다.
몇 년을 수련했어도 응용이 막히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양은 서로 떨어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서
경을 깨닫는다. 경을 알고 태극권을 수련하면 스스로 그 묘미를 터극할 수 있다. 마음을 무의 경지로
만들어 상대가 나오는 방향에
따라야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노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 성 이(李). 자 담(聃). 이름 이(耳).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河南省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노자의 도
"천지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음양의
두 기가 서로 작용하여 조화로운 기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노자가 주장하고 있는 도란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의 근원과
법칙임을 알 수 있다. 도는 기(물질)이면서 리(법칙)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만물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름이 없는 것과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도가 만물을 발생한다고 했을 때 도는 혼성된 물의
존재이다. 그래서 "혼돈 가운데 이루어진 무엇이 있으니 그것은 천지에 앞서 존재한다."
고 하였다. 동시에 도는 만물을 떠나 있는 일종의
절대적 '리'이다. 상도(常道), 즉 영원불변하는 도라 불린다. 영원불변하는 도는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사물을 떠나 있으므로
형상이 없다. 그래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希)라 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뒤섞여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첫째, 도는 이름이 없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그러한 도(常道)가 아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는 도를 무한한 것으로 어떠한 규정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계가 있는 명칭으로 이름 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논어』
에서 발견되고 있는 도란 무엇인가?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공자가 강조한 인과 예는
그들이 지어낸 도일 뿐,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도는 참된 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큰 도가 사라지니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생겨 큰
거짓말이 있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이 서로 화목하지 않자 효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나오게
되었다."
둘째, 도는 공평무사하다. 노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인격신인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을 도로 변화시키면서 도의 성질을
객관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도는 인간적인 감정이나
의지가 없고, 인간의 기대나 의지에서 독립하여 존재한다. "천지는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狗)로 여긴다."
'추구'는 풀로 만든 강아지인데, 제사 때 만들어 쓰고는 아무데나 버리는 것이다. 이 주장은
도가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함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도는 허정(虛靜)하다. "도는 텅비어
있으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도는 공허한 것이어서 영원히 충만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도는 또한 고요히 머물러 있다." 만물은
모두 장대하게 생장하지만 최후에는 모두 그것들이 본원인 도로 돌아간다. 이것을
두고 만물이 근원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는데 결국
고요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자의 덕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인간도 크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를 차지한다. 인간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덕론이란 만물의 본성을 토론하는 것이다. 노자는 우주의 본원인 도가
만물에 깃들여 만물의 본성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만물의 본성은 곧 도의 덕성이다. 노자가 말한 '덕'은 '자연'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하다', '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도, 욕망도, 행위도 없는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노자의 윤리론
노자는 최고의 인격을 갖춘 성인은 우주의 본원인
도의 덕성을 체현하고 무위자연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주장한 도덕 원칙은 다음과 같다.
"덕성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 자는 마치 처음
태어난 갓난아기와 같다. 갓난아이는 무지하고 무심하므로 독충도 찌르지 않고 맹수도
덤벼들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발톱을 대지 않는다.
뼈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꽉 움켜쥔 주먹은 단단하다. 하루 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자연과의 조화가 최고로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단단한
것으로 변한다. 초목도 자랄 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었을 때는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세고 강한 것은 죽음에 속하는
무리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에 속하는 무리이다.
따라서 무력이 강하면 오히려 적을 이길 수 없고 , 나무도 억세면 결국 생명을
마치고 만다. 그러니 강하고 큰 것은 결국 아래에
깔리게 마련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로 오르게 마련이다."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있게 되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있게 되었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있게 되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있게 되었다.
예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엷어서 나타난
것이니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재앙의 시작이다. 근거도 없이 하는 억측은 도의
겉치레에 지나지 않으니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따라서
대장부는 돈후함으로 처신하지 경박함으로 처신하지 않으며, 소박하고 진실함으로
처신하지 겉치레로 처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박함과 겉치레를 버리고 돈후함과 질박함을 취한다." 따라서 그는 성인이라면 겉으로는
비록 남루한 옷을 결쳤을망정 안으로는 아름다운
옥석을 품은 듯하다고 하였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강이나 바닷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낮은 곳에 잘 처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분명하지 못한 것이며, 자기가
식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총명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를 뽐내는 것은
도리어 공을 이루지 못한 것이며,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은 도리어 여러 사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니 후왕(侯王)은 스스로를 '외롭고(孤)', '부족하며(寡)', '좋지 못한(不善)'
사람이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을 뿌리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최고의 영예는 도리어 영예가 아니다. 옥같이
귀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돌같이 굳세기를 바라지
않느다." 성인은 언제나 자신을 겸손하게 아래에 처한다고 표시하여 영원히
자신의 겸허한 미덕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심과
욕망을 줄여야 한다.
"욕심이 많은 것보다 죄악이 큰 것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해악이 큰 것이 없으며, 얻겠다는 탐욕보다 죄의 근심이 큰 것은 없다.
만족할 줄 알아 그치는 사람만이 영원히 만족한다."
"성인은 사사로이 자신의 것을 쌓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갖게 된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모두
주므로 오히려 자기가 더 많게 된다." 노자가 사심이 없음을 사심에 있음에 도달하는
한 가지 수단으로 간주한 것은 아지곧 사심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노자의 도덕 원칙은 결코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는'그런 것이 아니라, '아주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있는' 그런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노자의 생존 년대는 불확실하지마는 적어도 그에 의하여 대표되는 도가사상은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 왕조의 세력이 약해져서 각 지방제후의
나라들이 서로 멋대로
다투어 무수한 나라가 생겨났다가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망해간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보려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바로잡을 경륜을 들고나와 자기의
주장을 선전하기에
힘썼다. 후세에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를 비롯하여
유가·묵가·명가·법가·병가·농가·
음양가 등 수많은 유파들이 있었다.
도 는 만물을 생성하며 변화시키고 있지만 그 작용에는 도가의
사상을 특징지우는 몇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로 노자는
'되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고 하였다. <도>는 만물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킨다. 이때 만물의 발전은 반드시 일정한 정도(곧
극점)
에 이르면 다시 자연히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물 중에는 무조건 영원히
발전해나가기만 하는 것이란
있을 수가 없다. 생물들은 태어났다 자라서는 늙고 죽음으로써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변화의
단계를 노자는
노자는 사람의 존재도 우주 속의 자연의 한가지 현상으로서 파악한다. 사람도, 봄에 돋아났다 가을에 서드는
풀이나 산에 솟아있는
바윗돌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연의 한 요소라는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사람이 나서 자란 다음 늙고 다시 죽는
것은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도의 변화>소그이 한가지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욕망과
평가를 쫓아 자연변화의 도를 어기고 자기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가 자연의 한가지
현상에 불과하며,
자기의 욕방이나 가치판단이 모두 헛되고 그릇된 것이을 깨닫지 못한다. 여기에서 사회의 혼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불행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춘추시대(BC722-BC467)에 발생한 노자의 사상은 전국시대(BC466-BC221)에 이르러 장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 그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이른바 도가가 형성되었다. 전국시대 말엽에 이르러 도가사상은 유가사상 다음
가는 가장 유력하고도
보편적인 한 학파로 발전한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만 보더라도 도가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삼십가가의
수많은 저술들이 재록되어 있다.
이들의 저서를 읽어보면 이들의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생기기도 하였으나 원칙적으로는 모두 노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사람의 내심의 수양을 통하여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인위적인 일체의
행위를 반대하며, 그러한 인위에
의하여 발전한 모든 문화제도를 무시한다. 이러한 문화제도는 모두가 허망한 실속없는 것들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따라서 그의 저서 <노자>는 후세에 와서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도가의 가장
중요한 경전의 하나이다. 그의 뒤를 이어 장자(莊子)라는 사상가가 나와
도학(道學)을 발전시켰으므로, 도학은 흔히 <노장학(老莊學)>
이라고도 불리어졌고, 도가에 있어서의 노자와 장자는 마치 유가(儒家)에 있어서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처럼 여겨지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위나라 왕필에 의하여 지금 전해지는 판본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주석이 씌어졌었다. 그리고 앞에 얘기한 것같은
도학의 성행으로 말미암아 그 뒤로는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노자>의
주석서들이 나왔다. 근인 마서륜의 <노자핵고>
같은 것은 이 방면 연구의 좋은 참고서라 할 것이다. 마서륜을 비롯한 근래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노자>에는 수많은
판본들이 있지마는 그중의 근본적인 이본은 크게 다음과 같은 네가지라고 할 수
있다.
1.왕필 <노자도덕경주> 2.하상공<도덕진경주> 3.부혁 <교정고본노자> 4.당 현종 <도덕경주>
노자와 공자
노자는 주나라 수도 낙읍에서 몰락해가는 주왕실
서고를 지키는 기록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남아있는 주대의 귀중한 책들을
밤낮으로 접할 수 있었다. 노자는 공자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공자가 익히 알고 있는 예의 규범에
관해서도 노자가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의(葬儀) 때 일식(日食)에 부딫치면 어떻게 하는가? 자식이 죽었을 때 묘소를
가까이 할 것인가 멀리할 것인가? 나라에
상사(喪事)가 있을 때 전쟁을 피할 것이냐 어찌할 것이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죽은 국왕의
위패를 딴 곳으로 옮길 것이냐 그만둘 것이냐?
등등의 문의에 노자는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명확하게 답을 주었다.
공자는 낙양에 수일 동안 머물다가 귀로에 올랐다.
노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전송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듣자하니 사람들이 전송을 할 때,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주고, 돈이 없는 사람은 충고나 격려의 말을 남긴다고 합니다. 나는 돈도 없는
데다 잠시나마 도덕과 학문이 있는 척하고 있으니,
당신께 몇 마디 남기고자 합니다. 첫째, 그대가 옛 성현이라고 우러러보던 이들은
이미 육체와 뼈마저 썩어 버리고 남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남긴 헛소리분이외다. 그러니 옛 것을 익히되 새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어 언뜻 봐선
점포가 빈 것 같고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고 했소.
그러니 제발 그 교만과 욕심 그리고 잘난 체하는
병과 잡념을 내버리는 게 좋을 것이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외다."
주자학 (성리학)
중국 송나라때에 정맆된 학설로 도학, 이학, 도덕사상을 집대성 한것이 주자학
(성리학) 이다.
성리학은 이, 기,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의 생성과 자연의 이치를 형의학적,
철학, 태극설, 이기설, 심성론 등을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로서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줄임말이다.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
)는
‘성즉이(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
)·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이(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
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
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여기서 주자는 천지도 하나의 태극이요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태극이라 하였고, 이 태극에서 음양으로의 이행(移行)은
태극의 동정(動靜)에 의하는 것이며
동정은 곧 음양의 두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 만물의 근원적인 생성(生成)이 전개된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이기설은 우주 ·인간의 성립
·구성을 이(理)와 기(氣)의 두 원칙에서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이 ·
기라는 말은 성리학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있었으니, 《역경(易經)》에서는 천지만물을 음양 2기의 활동에서 성립된 것이라 하여
이 ·기의 개념을 말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는 그의 《태극도설》에서 모든 근원인 태극이 2기를 낳고, 2기에서
수 ·화 ·목 ·금 ·토의 5행을
낳고, 5행에서 남 ·녀가 생겨 거기에서 만물이 화생(化生)하였다고 논하였다.
주자는 인간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본연지성은 이(理)요, 선(善)이라 하였고,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청탁과
정편이 있어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악하게도 된다 하였다. 정(情)은 반드시
악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선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즉 기질을 맑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情)이 선하게 되지만 이것을 탁하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情)이 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에 따라 청탁 ·지우(智愚) 등 여러 차별이 있으나, 이 정은
불변이 아니므로 인간의 노력과 수양에
따라 우(愚)가 지(智)로도 변하고 탁함을 청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여기에 인간의
윤리성 및 도덕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성리학자들은 성(誠) ·경(敬)을 공통의
진리로 파악하였다.
인간이 자연의 진리와 진정한 자아를
추궁하여 근원적 도리에 도달하는 요체로서 주돈이는 이것을 정(靜)에 두었고, 정호는
성(誠)에 두었으며 정이와 주자는
경(敬)에 두었다. 정이는 “수양에는 경이 필요하며 학문의 발전에는 치지(致知)가 중요하다”
고 하였으니, 이들 성리학자들의
정(靜) ·성(誠) ·경은 필연코 인(仁)과 의(義)로 귀일되는 것이다. 즉, 인 ·의의 인식 파악은
성 ·경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였다.
忠裂王, 1236(고종 23) ~ 1308(충렬왕 34)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敎理)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辨斥)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즉,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
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을 말한다.
퇴계는 정통 정주학의 계통을 따라서
항상 이우위설(理優位說)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으며,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오직 이 이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허(虛)하지만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없는 것(無) 같지만 지극하게 있는 것(有)이다. …능히 음양 ·오행 ·만물 ·
만사(萬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기와 섞어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유(萬有)를 명령하는
자리요, 어느 것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퇴계는 당시에 사화(士禍)가 연달아
일어나서 올바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 진실로 선악과 정사(正邪)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 표준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이같은 성리학설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보다 35년 후에 태어난 이율곡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위시한 제자(諸子)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유학의
본령(本領)을 들어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는 논하기를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자(孔子)가 가르친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든지 인의(仁義)와
같은 일상적으로 인간이 행할 도리를
떠나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규범(規範:所當然)만을 알고 근본원리[所以然]를
알지 못하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선행(善行)에 합치한다 하더라도 도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율곡성리학의 요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경험성)에 근거하여 그 까닭을 추구함(논리성)에 있어 논리적인 모순이나
비약을 배제하고 그 본원성(本源性)을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內的)으로
반드시 인륜(人倫)에 바탕을 둔
덕성(德性)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物理)에 밝은 경제의 부강(富强)을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퇴계 ·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 실학사상(實學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宋時烈, 1607(선조 40) ~ 1689(숙종 15) ]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恩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아명은 성뢰(聖賚).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 경릉참봉(敬陵參奉)을
했으며, 우의정 좌의정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그리고 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49년
효종의 즉위로 다시 벼슬에 나와 장령(掌令)·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집의(執義)를 지내면서 13개
조항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 중 청서파(淸西派)에 속했던 그는 공서파(攻西派)의 김자점(金子點)이 영의정에 오르자 낙향,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서적편찬 및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김자점 몰락 후,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우며 집의·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북벌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때,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윤휴등 남인의 3년설을 물리치고 자신의
주장대로 1년설을 관철하여 남인이 실각하였는데,
이것은 후일 정쟁(政爭)의 빌미가 되었다(제1차 禮訟論爭). 이후 현종의 신임을 얻어
숭록대부(崇錄大夫)·좌참찬 등을 지냈으나 60년(현종 1) 우찬성에 재직
중 남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하였다. 68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으나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71년 다시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재차 논의되자, 예론(禮論)에 따라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됨과 함께 예(禮)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실각하였다(제2차 禮訟論爭). 그 뒤
덕원(德源)·웅천(熊川)·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84년 봉조하(奉朝賀)에 올랐다. 그 뒤
제자인 윤증(尹拯)이 윤선거(尹宣擧)의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윤휴와의 관계로 인해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사제간의 의가 깨졌다. 이로써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일어났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다가 89년
숙종에게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같은 해 6월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중 남인의 주장으로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뒤 신원되었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로,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우암
송시열의 저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주문초선(朱文抄選)》 등이
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에
배향되고, 화양(華陽)·매곡(梅谷)·구봉(龜峰)서원 등 전국 7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 송자대전
송원교는 (1288~1370)
그리고
태극권 의 문주인 장삼봉은 문하에 일곱명의 수제자를 두었으며 그중에 송원교를 장문으로 태극권을 이여 나아 가도록 하였다.
송원교는 (1288~1370) 의 저서<송씨태극공원류지파론>에는
송원교, 유연주, 유대암, 장송계, 장취산, 은이형, 막곡성 등 7명이 매년
무당산으로 찾아가서 장삼봉 진인에게 태극권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무술의 창시자는 문주라 칭하고,
그의 순수한 정통 혈통을 이여나갈 제자를 수제자중에 한사람을 골라서 지정을 하는데 이것을 장문이라고 칭한다.
왜냐하면, 여러명의 수제자를 양성하다 보면 다 제각기 무술을 이해하는
것이 다름으로 나중에 바뀔수가 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한사람을 지정하여 순수
혈통을 전승 한다.
따라서, 송원교를 순수혈통의
계승자 즉 장문으로 정하고, 나중에는 일곱명의 수제가들이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태극권의 이해를 발전 시켜나갔다.
그 이유로
명나라에 들어와 태극권은 남파 태극권과 북파 태극권의 양파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남파 태극권의 원주인
건곤파의 송원교의 가전으로 지금 까지 내려 왔다. 일부에서는
남파가 실전 된것으로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건곤파의 송원교의 남파 태극권은 가족중에서도 일족 이외에는 함부로 전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북파 태극권은 진(陳)씨
일가들이 모여사는 진가구(陳家溝)에 전해져 '陳家태극권'으로 계승되었다.
송원교는 (1288~1370)
의 저서<송씨태극공원류지파론>를 남겼고 그의 저서에 장삼풍에 지도 받았던 설도 나와 있다.
화룡진인은
송나라 (960~1277) 시대에
진박노조(陳博老祖)라는 태극학설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
있었다. 바로 당시의
명인(名人)이었던 이정(二程), 주희(朱熹) 등과 함께
태극도설(太極圖設)을 써서 남긴 진희이(陳希夷)이다. 진희이는 양생장수의
도와 신체운동을 화룡진인(火龍眞人)에게 전수하였는데, 이 화룡진인이
바로 장삼봉 진인의 스승이다.
화룡진인은 도사로서 많은 저서에 그이름이 나온다.
송
원교의 저서<송씨태극공원류지파론>
송덕፩